조선 숙종 목차 생애 평가와 비판 기타 가계 숙종이 등장한 작품 읽어 보기 각주 둘러보기 메뉴순으로 읽은 숙종 대왕 묘지문돈으로 읽은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5권, 7년(1666 병오 / 청 강희(康熙) 5년) 3월 25일(을사) 2번째기사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權道의 말단’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ehehWorldCat72812249n850222230000 0000 2564 1294118677586
안천대군 어선안원대군 진안풍대군 정익조 행리안창대군 매불안흥대군 구수함녕대군 안함창대군 장함원대군 송도조 춘함천대군 원함릉대군 고태함양대군 전함성대군 응거완창대군 자흥환조 자춘완원대군 자선완천대군 평완성대군 종이완자불화이나해태조 성계완풍대군 원계영성대군 천계의안대군 화진안대군 방우정종익안대군 방의회안대군 방간태종덕안대군 방연무안대군 방번의안대군 방석의평군 원생순평군 군생금평군 의생선성군 무생종의군 귀생진남군 종생수도군 덕생임언군 녹생석보군 복생덕천군 후생임성군 호생도평군 말생장천군 보생정석군 융생무림군 선생양녕대군 제효령대군 보세종성녕대군 종경녕군 비함녕군 인온녕군 정익녕군 치근녕군 농희령군 타후령군 간혜령군 지문종세조안평대군 용임영대군 구광평대군 여금성대군 유평원대군 임영응대군 염화의군 영계양군 증의창군 공밀성군 침익현군 연영해군 당담양군 거한남군 어수춘군 현영풍군 전단종덕종예종덕원군 서창원군 성월산대군 정성종인성대군 분제안대군 현연산군중종무산군 종안양군 항봉안군 봉전성군 변계성군 순완원군 수회산군 념견성군 돈익양군 회경명군 침운천군 인양원군 희이성군 관영산군 전폐세자 황창녕대군 성이인수이영수이총수양평군 인이돈수인종명종복성군 미금원군 영봉성군 완영양군 거덕흥대원군해안군 희덕양군 기순회세자 부선조영창대군 의임해군 진광해군 혼의안군 성신성군 후원종의창군 광순화군 보인성군 공인흥군 영경창군 주흥안군 제경평군 늑영성군 계폐세자 지인조능원대군 보능창대군 전능풍군 명소현세자 왕효종인평대군 요용성대군 곤숭선군 징낙선군 숙현종숙종경종영조연령군 훤진종장조정조의소세손 정정조은언군 인은신군 진은전군 찬문효세자 순순조상계군 담문조철종헌종고종원자 융준순종완친왕 선의친왕 강의민황태자 은원손 진왕세자 구
조선 숙종1661년 태어남1720년 죽음조선의 서예가김육송시열허목조선의 작가운현궁조선의 시인병사한 사람조선 영조조선 현종조선 경종전주 이씨18세기 한국 사람17세기 한국 사람대량 살인자17세기 한국의 군주18세기 한국의 군주
1661년10월 7일음력 8월 15일1720년7월 12일음력 6월 8일1674년9월 22일음력 8월 23일1720년7월 12일음력 6월 8일조선왕성이(李)휘본관전주(全州)자현종명성왕후김만기인경왕후민유중인현왕후김주신인원왕후1674년1720년1674년영의정허적섭정1717년1717년1720년경종왕세자대리청정서인남인영조영조태조고종광해군정종1661년10월 7일음력 8월 15일현종명성왕후 김씨경덕궁효종명성왕후 김씨효종수양제명성왕후1667년왕세자1674년예송허목명성왕후 김씨명성왕후 김씨희빈 장씨남인서인인현왕후남인서인당파1680년노론소론환국갑인예송허적1680년허견음모가 발각되자김석주1683년인현왕후희빈 장씨1688년왕자 윤1689년기사환국1694년갑술환국창경궁인현왕후1701년인현왕후희빈 장씨인현왕후인현왕후10월소론노론소론1717년유계정호윤증붕당광해군대동법평안도함경도상업상평통보임진왜란병자호란청나라1712년이선부백두산정계비에도 막부울릉도조선 통신사1682년1711년1719년왜관 무역후 레 왕조인선왕후복상논쟁자의대비1674년청나라오삼계1680년1683년김석주김만기민정중상업화폐미륵신앙반란노비검계살주계비밀결사1689년장희빈송시열김수항처형통진문수산성1694년인현왕후장희빈서얼역관무인상인노비소빙기흉년홍수질병구월산장길산중인토문강안용복울릉도대보단애국심압록강인현왕후장희빈숙종실록민진후저주숙빈 최씨궁녀인현왕후장희빈숙빈 최씨희빈 장씨장희빈최석정이세백존호7월사관승지좌의정정유독대이이명연잉군연령군신임옥사이이명대리청정당의통략영중추부사윤지완정승공정왕묘호세조노산대군노산대군부인 송씨1698년사육신1691년인조소현세자소현세자빈 강씨금위영5영서인남인등창1720년7월 12일음력 6월 8일경덕궁시력조선왕조실록구토주안상다과상미음노론이이명연잉군연령군노론경종연잉군경기도고양시덕양구서오릉명릉청나라붕당이덕일윤증세자영조사도세자정조허견의 옥사허적윤휴삼번의 난오세번악주도체찰사부서인허적도체찰사부허적허적윤휴공명첩토호1697년경기도수어사이세화군관청나라교역중강개시1697년1698년1월청나라좁쌀서울경기충청평안도황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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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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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肅宗 | |
---|---|
숙종 어진 하응달 모사본 (1926년 모사본) | |
지위 | |
조선 국왕 | |
재위 | 1674년-1720년 |
전임자 | 현종 |
후임자 | 경종 |
섭정 | 영의정 허적 (1674) 왕세자 이윤 (1717~1720) |
재상 | 영의정
|
이름 | |
휘 | 이돈 (李焞) |
묘호 | 숙종 (肅宗) |
존호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協極神毅大勳) |
시호 | 희순 장문헌무경명원효 대왕 (僖順 章文憲武敬明原孝 大王) |
능호 | 명릉 (明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61년 10월 7일(1661-10-07)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
사망일 | 1720년 7월 12일 (58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희궁 융복전 노환, 안질환, 등창 등의 합병증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현종 |
모친 | 명성왕후 |
배우자 |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
종교 | 유교 성리학 |
숙종 (肅宗) | |
---|---|
지위 | |
조선의 19대 국왕 | |
재위 | 1674년 ~ 1720년 |
전임자 | 현종 |
후임자 | 경종 |
이름 | |
휘 | 이순 또는 이돈(李焞) |
별호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시호) |
묘호 | 숙종(肅宗) |
시호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
사망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희궁 융복전 노환, 안질환, 등창 등의 합병증 |
매장지 | 명릉 (明陵)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이씨(李氏) |
부친 | 현종 이연 |
자녀 | 경종 이윤, 영조 이금 |
종교 | 유교(성리학) |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 재위: 1674년 9월 22일 (음력 8월 23일)[1] ~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2])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돈(焞), 본관은 전주(全州).[3], 초명은 용상(龍祥), 광(爌), 자는 명보(明譜), 사후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 8월에서 1720년 7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 8월에서 1674년 10월까지 영의정 허적이 섭정하였으며 1674년 10월에서 1717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 3월에서 1720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숙종은 역대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이다. 숙종을 마지막으로, 강한 왕권을 가진 왕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 또한 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 (51년 7개월)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 태조, 고종, 광해군, 정종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목차
1 생애
1.1 즉위 전
1.2 즉위
1.3 재위기간 중
1.3.1 환국 정치
1.3.2 외교
1.4 붕당정치와 왕권 강화
1.5 통상 정책
1.6 장희빈 사사 전후
1.7 이이명과 독대
1.8 생애 후반 및 업적
1.9 최후
1.10 사후
2 평가와 비판
2.1 긍정적 평가
2.2 부정적 평가
3 기타
3.1 성격
3.2 윤휴 사사 공작
3.3 조세 정책의 실패
4 가계
5 숙종이 등장한 작품
5.1 드라마
5.2 영화
6 읽어 보기
7 각주
생애
즉위 전
숙종은 1661년(현종 2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돈(李焞),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 효종은 어느날 밤 꿈에 며느리 명성왕후 김씨의 이불에 뭔가 있는 것을 보고 들춰보니 용이 있었다고 한다. 효종은 꿈을 꾸고 손자가 태어날 태몽이라 여기고 손자의 이름을 용상(龍祥)이라 짓고 손자를 기다렸으며, 이는 숙종의 행장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효종은 손자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2년 전에 먼저 사망하였다. 성인이 된 뒤에 이름을 용상에서 광으로 개명했다가 수양제와 이름 음자가 같다는 이유로 다시 돈 또는 순으로 개명하고 자는 명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난 이후 모후 명성왕후는 다른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는 독자로 성장했다. 숙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모후 명성왕후는 남자형제도 없는데다가 병약한 체구를 타고난 그가 일찍 죽지 않을까 늘 염려하였다. 1667년(현종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현종이 급서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즉위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속깊은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 어린나이에 누구 간섭없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즉위한 그해에 제2차 예송으로 남인 허목 등의 기년설(만 1년설)을 지지하고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는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그가 즉위 당시 어린 나이라는 점을 들어 모후 명성왕후 김씨는 그의 친정을 반대했지만 숙종은 모후의 반대를 뿌리치고 친정을 시작했다. 한편 명성왕후 김씨는 그의 후궁 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그를 궁궐 밖으로 추방하게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후일 명성왕후가 열병으로 사망한 뒤 환궁하고, 남인을 등에 업고 서인가의 사람이었던 인현왕후와 정쟁을 벌이게 된다.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간의 대립 관계가 더 더욱 치열해지고, 1680년 초 부터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이른바 환국 정치가 주된 현상이 되었다.
재위기간 중
환국 정치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 (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희빈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희빈 장씨 처소인 취선당에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한 것을 이유로,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때 소론은 세자 윤에 대한 옹호여론으로, 노론은 비판여론으로 돌아섰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외교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협상하여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 조선 간의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폐한지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로 하여금 에도 막부 정권과 협상하여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를 세 차례나 파견(1682년, 1711년, 1719년)하여 왜은 사용 조례를 확정함으로써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1678년, 안남국(후 레 왕조)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안남왕은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표류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붕당정치와 왕권 강화
14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숙종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 시대는 붕당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국가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 초에는 왕권 강화를 주장해 온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복상논쟁에서 왕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大功)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의 승리는 현종 중반 이후 기반을 다져 온 허적 일파의 정치적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1676년)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1674년(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1683년).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 김만기 · 민정중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통상 정책
서인 정권은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정초군과 통합하여 금위영으로 발족시켜(1682년) 5군영제를 완성시켰다. 병권은 대체로 왕이 신임하는 종척(宗戚)들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왕이 군대 통수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정부는 민생 향상과 산업 진흥을 위해 양인의 군포를 감해 주고(1703년), 화폐 주조(상평통보)와 화폐 유통을 장려하여 상업을 진흥시켰다. 각 부대도 화폐를 주조하고 상업 행위를 하여 점차 영리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는 미륵신앙을 가진 하층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노비들이 주축이 된 검계·살주계 등 비밀결사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회가 매우 불안했다.
9년간 집권한 노론은 1689년(숙종 15년)에 남인계 출신의 후궁인 장희빈이 낳은 왕자(나중의 경종)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동안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김수항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남인 집권기에는 청나라의 내란과 관련하여 강화도에 성을 쌓고, 맞은편의 통진에도 문수산성을 쌓는 등(1694년)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1694년(숙종 20년)에 왕이 마음을 바꾸어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강등시키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밀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은 서얼·역관·무인·상인 그리고 노비층과도 연결하여 남인 측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거사 자금과 힘을 빌렸다.
1694년(숙종 20년)부터 1720년(숙종 46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빙기(小氷期)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을 가져왔다. 더욱이 1697년(숙종 23년)에는 10여 년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張吉山)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숙종 대에 대동법을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였으며(1708, 숙종 34년), 서북인을 무인으로 대거 등용하고(1709년), 중인과 서얼을 수령에 등용하도록 조처했다(1697년, 숙종 23년). 특히 1712년(숙종 38년)에는 청과 북방경계선을 확정지어 백두산 아래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삼았다. 여기서 토문강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서 정해졌지만, 조선 측은 그 후 이 강을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백두산 정계는 조선 측의 영토 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
한편, 수군 출신의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일본은 이를 인정했다(안용복의 증언. 이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울릉도 도항 금지라는 사실은 있었지만 독도를 조선의 영토 인 것처럼 일본 측이 인정한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있다).(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울릉도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1705년(숙종 31년)에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 사당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리고(1707년, 숙종 33년),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1709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숙종 말년에는 남구만(南九萬)의 노력에 의해 세종 때 설치했다가 폐지한 ‘폐사군’의 일부를 복설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강화도의 농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고, 강화도 내성(內城, 1704년~1709년), 북한산성(1711년~1712년), 평양성, 안주성 등이 잇따라 축조되어 방위체제가 훨씬 강화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삼남지방에서 양전 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 명으로 늘어났다(1720년). 숙종 때에는 문화 사업 면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대전속록》, 《열조수교》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가 전란의 피해 복구와 국가 재정비 사업이 일단 마무리되어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장희빈 사사 전후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4]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그는 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자신을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어머니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4]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4] 숙종은 노론의 때아닌 존호 추상 요청을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
이이명과 독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7월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정유독대'를 실시했다.[4] 숙종과 이이명의 독대 시 오고간 대화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 때 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4]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4]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숙종실록』 43년 7월 28일 기사)”
그러나 예정대로 독대는 진행되었다.
생애 후반 및 업적
그밖에, 숙종은 조선의 제2대 국왕인 공정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며,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외롭게 죽은 노산대군과, 그 아내 노산대군부인 송씨의 복위를 청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고 각각 단종이라는 묘호와 정순왕후라는 시호를 올림(1698년)과 동시에 사육신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으며(1691년), 폐서인되었던 인조 적장남 소현세자의 아내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복위시켰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였고,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숙종은 생전 어진을 2번 그렸는데 모두 익선관 차림의 복장이었다 한다. 713년(숙종 39) 숙종은 자신의어진을 그리기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을 설치했고, 도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은 이때 왕의 초상화에 '어진(御眞)'이라는 명칭을 짓고 그대로 확정시켰다. 그러나 숙종의 어진 2개는 후대에 불타서 사라졌고, 1926년 열성어진 부 열성어제를 편찬할 때 하응달이 숙종의 어진을 보고 모사했으나 정확도는 떨어진다. 숙종의 어진은 1926년 하응달이 행방불명의 원본을 보고 그린 어진이 전한다.
최후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서인과 남인간에 당파싸움을 완화하고 왕과 신하들 간에 균형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여기에 등창이 생기고 노환까지 겹쳐 결국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5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승하하기 전,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배가 심하게 부풀어오르는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를 한번 크게 한 뒤 승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숙종은 원래 좋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재위 중반기부터 밤에 식사를 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낮에는 간단히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밤늦게 주안상과 다과상을 받았으며, 이러한 습관이 지속되자 재위 말기에는 미음조차 삼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좋지 못한 습관이 숙종의 수명을 단축시킨 원인 중 하나이다.
사후
그는 1715년부터 노론 중신 이이명을 불러다가 비밀리에 독대를 하며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이를 근거로 노론은 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묘호 숙종 의 '숙'은 엄격하다는 의미이며, 강덕극취(剛德克就) (강직하고 덕이 있게 앞으로 나아간다) 에서 따 왔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희순왕(僖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고,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정치 세력을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에 그가 죽은 후 절대 왕권은 숙종의 치세에서만 끝나게 된다. 조선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들이 교묘히 조종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 평가
이덕일은 그가 윤증이 제시한 세가지 타협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패도정치[5] 라며 비판하였다. 이덕일에 의하면 윤증이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 (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 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 [5](『당의통략』)'라고 제시한 것을 숙종이 받아들여야 했다며 비판했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 (김석주) 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 정객에 불과했다.[5]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6]
거듭된 환국으로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기타
성격
그는 세자 시절 낙죽(우유)을 마시다가 송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불쌍한 마음에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본래 부드러운 성격이었으나
한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질을 내었으며,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도 곧잘 취했다고 한다. 이러한 울화병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까지 이어졌다.
윤휴 사사 공작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서인은 북벌을 위한 허적의 도체찰사부 복설에 찬성하였으면서도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며 날조했고, 숙종은 이를 근거로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의 근거가 된 윤휴의 북벌론을 문제삼아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조세 정책의 실패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4] 숙종은 공명첩의 발행 양을 늘리는 한편, 문무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에게 곡식을 풀라고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은 그의 명을 따르기를 거절한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1697년(숙종 23년) 4월 경기도 광주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 숙종은 강경책을 발동, 관련자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한편 숙종은 청나라 조정에 청하여 조선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식량의 지원을 요청한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1697년(숙종 23년)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이 개시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1698년(숙종 24년)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4] 그러나 흉년과 흉작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양반들과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도 심해져 민란과 도주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인구이동을 통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가계
- 증조부 : 제16대 인조
- 증조모 : 인렬왕후 한씨
- 조부 : 제17대 효종
- 조모 : 인선왕후 장씨
- 부왕 : 제18대 현종
- 모후 : 명성왕후 김씨
- 부왕 : 제18대 현종
- 조부 : 제17대 효종
숙종 (1661 ~ 1720 / 재위: 1674 ~ 1720) - 45년 10개월
- 정비 :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1661년 - 1680년)
- 장녀 : 공주 (1677년 ~ 1678년)
- 차녀 : 공주 (1679년 ~ 1679년)
- 제1계비 :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년 ~ 1701년)
- 제2계비 :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년 ~ 1757년)
- 후궁 :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 희빈 장씨, 1659년 ~ 1701년)
- 장남 : 제 20대 경종 (景宗, 1688년 ~ 1724년)
- 차남 : 성수(盛壽) (1690년 ~ 1690년)
- 장남 : 제 20대 경종 (景宗, 1688년 ~ 1724년)
- 후궁 : 이현궁(梨峴宮)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년 ~ 1718년)
- 삼남 : 영수(永壽) (1693년 ~ 1693년)
- 사남 : 연잉군 금(延礽君 昑) : 영조 (英祖, 1694년 ~ 1776년)
- 오남 : 왕자 (1698년~ 1698년)
- 후궁 : 명빈 박씨 (䄙嬪 朴氏, ? ~ 1703년)
- 육남 : 요절[7]
- 칠남 : 연령군 훤 (延龄君 昍, 1699년 ~ 1719년)
- 후궁 : 영빈 김씨 (寧嬪 金氏, 1669년 ~ 1735년), 김수항의 종손녀
- 후궁 : 귀인 김씨 (貴人 金氏, 1690년 ~ 1735년)
- 후궁 : 소의 유씨 (昭儀 劉氏, ? ~ 1707년)
숙종이 등장한 작품
드라마
- 《장희빈》 (MBC, 1971년, 배우:박근형)
- 《여인열전 - 장희빈》 (MBC, 1981년~1982년, 배우:유인촌)
- 《인현왕후》 (MBC, 1988년, 배우:강석우)
- 《장희빈》 (SBS, 1995년, 배우:임호)
- 《장희빈》 (KBS2, 2002년~2003년, 배우:전광렬)
- 《다모》 (MBC, 2003년, 배우:선우재덕)
-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KBS1, 2007년, 배우:손준영)
- 《동이》 (MBC, 2010년, 배우:지진희)
- 《인현왕후의 남자》 (tvN, 2012년, 배우:서우진)
- 《마의》 (MBC, 2012년~2013년, 배우:강한별)
- 《장옥정, 사랑에 살다》 (SBS, 2013년, 배우:유아인, 채상우)
- 《대박》 (SBS, 2016년, 배우:최민수)
- 《해치》 (SBS, 2019년, 배우:김갑수)
영화
- 《장희빈》 (1961년, 배우:김진규)
- 《요화 장희빈》 (1968년, 배우:신성일)
읽어 보기
- 한국의 역사
- 조선 왕 가계도
각주
↑ 《肅宗實錄》《숙종실록》 1권
↑ 《肅宗實錄》《숙종실록》 65권
↑ 실록에선 순으로 읽기도 하고, 돈으로 읽기도 한다. 순으로 읽은 숙종 대왕 묘지문,돈으로 읽은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5권, 7년(1666 병오 / 청 강희(康熙) 5년) 3월 25일(을사) 2번째기사
↑ 가나다라마바사아자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 가나다 ‘權道의 말단’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 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
↑ 연령군 묘비명에 연령군 훤이 명빈박씨의 둘째 아들이라 한다.
제19대 조선 왕 | ||
전 임 현종 | 1674년 ~ 1720년 | 후 임 경종 |
분류:
- 조선 숙종
- 1661년 태어남
- 1720년 죽음
- 조선의 서예가
- 김육
- 송시열
- 허목
- 조선의 작가
- 운현궁
- 조선의 시인
- 병사한 사람
- 조선 영조
- 조선 현종
- 조선 경종
- 전주 이씨
- 18세기 한국 사람
- 17세기 한국 사람
- 대량 살인자
- 17세기 한국의 군주
- 18세기 한국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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