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광해군 목차 이력 치세 생애 시조 기타 가계 광해군이 등장한 작품 관련 문화재 같이 보기 같이 읽기 각주 외부 링크 둘러보기 메뉴사이버 조선왕조‘왕의 얼굴’ 서인국, 임진왜란 속 용맹한 세자 광해 재조명《광해군일기》 광해 120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0월 30일(신유) 1번째기사사이버 조선왕조 서고의 <혜종대왕문서>역대국군(歷代國君) 광해군 항목광해군일기121권,9년(1617)11월21일3번째기사 광해군“조선 광해군”ehehWorldCat268096632n861334690000 0003 8312 077111866456500622951
안천대군 어선안원대군 진안풍대군 정익조 행리안창대군 매불안흥대군 구수함녕대군 안함창대군 장함원대군 송도조 춘함천대군 원함릉대군 고태함양대군 전함성대군 응거완창대군 자흥환조 자춘완원대군 자선완천대군 평완성대군 종이완자불화이나해태조 성계완풍대군 원계영성대군 천계의안대군 화진안대군 방우정종익안대군 방의회안대군 방간태종덕안대군 방연무안대군 방번의안대군 방석의평군 원생순평군 군생금평군 의생선성군 무생종의군 귀생진남군 종생수도군 덕생임언군 녹생석보군 복생덕천군 후생임성군 호생도평군 말생장천군 보생정석군 융생무림군 선생양녕대군 제효령대군 보세종성녕대군 종경녕군 비함녕군 인온녕군 정익녕군 치근녕군 농희령군 타후령군 간혜령군 지문종세조안평대군 용임영대군 구광평대군 여금성대군 유평원대군 임영응대군 염화의군 영계양군 증의창군 공밀성군 침익현군 연영해군 당담양군 거한남군 어수춘군 현영풍군 전단종덕종예종덕원군 서창원군 성월산대군 정성종인성대군 분제안대군 현연산군중종무산군 종안양군 항봉안군 봉전성군 변계성군 순완원군 수회산군 념견성군 돈익양군 회경명군 침운천군 인양원군 희이성군 관영산군 전폐세자 황창녕대군 성이인수이영수이총수양평군 인이돈수인종명종복성군 미금원군 영봉성군 완영양군 거덕흥대원군해안군 희덕양군 기순회세자 부선조영창대군 의임해군 진광해군 혼의안군 성신성군 후원종의창군 광순화군 보인성군 공인흥군 영경창군 주흥안군 제경평군 늑영성군 계폐세자 지인조능원대군 보능창대군 전능풍군 명소현세자 왕효종인평대군 요용성대군 곤숭선군 징낙선군 숙현종숙종경종영조연령군 훤진종장조정조의소세손 정정조은언군 인은신군 진은전군 찬문효세자 순순조상계군 담문조철종헌종고종원자 융준순종완친왕 선의친왕 강의민황태자 은원손 진왕세자 구
조선 광해군1575년 태어남1641년 죽음조선의 군인조선의 공신유교 신자한국의 섭정조선의 저술가조선의 작가가족 살해자운현궁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폐위된 군주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병사한 사람조선 선조전주 이씨대량 살인자16세기 한국 사람17세기 한국 사람16세기 한국의 군주17세기 한국의 군주
1575년6월 4일음력 4월 26일1641년8월 7일음력 7월 1일조선임금청나라명나라중립외교영창대군인목왕후능양군반정성이휘본관전주선조공빈 김씨임진왜란세자함경도전라도임진왜란임진왜란1608년남인이원익영의정대북서인인조반정인목왕후영창대군1591년광국원종공신임진왜란대한민국사시유씨사시왕세자 이지대리청정박승종1575년선조김희철공빈 김씨임해군공빈 김씨김희철선조임해군선조1591년종계변무임해군신성군정원군순화군광국원종공신선조의인왕후왕세자선조인빈 김씨신성군의정부좌의정정철동인영의정이산해유성룡이산해경연공빈 김씨인빈 김씨이산해이산해정철류성룡서인동인정여립기축옥사1592년4월임진왜란신성군분조임해군평양함경도전라도의인왕후1598년임진왜란신성군정원군호성공신인목왕후영창대군소북유영경적통론약밥인목왕후1608년음력 2월 2일유영경사류사회유영경유영경이산해이이첨정인홍대북공빈 김씨유영경대북이산해이이첨정인홍곽재우정인홍정인홍1608년경기도쌀조세소득세금대동법1611년양전 사업임진왜란창덕궁경희궁창경궁인경궁서적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허균홍길동전허준한의학동의보감파주교하중국 대륙1618년만주여진족후금1619년후금누르하치심양명나라강홍립김경서강홍립사르후상간하다아부달리부차 전투인조반정1622년모문룡가도1609년임해군계축옥사1613년영창대군인목왕후김제남인목왕후의인왕후부관참시북인1614년강화도1615년인조능양군능창군이이첨허균인목왕후1618년인목왕후인조반정임진왜란이이첨유희분박승종이이첨김개시허균성리학조선이이첨정인홍능창군영창대군1617년인목왕후허균이이첨김개시1623년인조반정이이첨김개시1623년인조반정강화도제주도1641년이귀김류최명길김자점능양군반정인목왕후인목왕후이이첨정인홍김개시제주도후금청나라정묘호란인조반정명나라후금강홍립명나라조선대한민국제주도시조2002년11월 15일사이버 조선왕조유씨사시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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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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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光海君 | |
|---|---|
지위 | |
조선 국왕 | |
재위 | 1608년-1623년 |
전임자 | 선조 |
후임자 | 인조 |
섭정 | 왕세자 이지(1619년 11월 ~ 1620년 1월) 영의정 박승종(1620년 1월 ~ 1620년 2월) |
재상 | 영의정
|
이름 | |
휘 | 이혼(李琿) |
존호 |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75년 6월 4일(1575-06-04)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641년 8월 7일 (66세)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제주목 (현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광해군묘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선조 이연 |
모친 | 공빈 김씨 |
배우자 | 폐비 유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청나라(후금)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립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자주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으나, 자기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반대했던 반대세력을 숙청하다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등 폐모살제(廢母殺弟)때문에 서인세력과 힘을 합치던 능양군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서인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목차
1 이력
2 치세
3 생애
3.1 세자 책봉 이전
3.1.1 생애 초기
3.1.2 세자 건저의 문제
3.2 세자 시절
3.2.1 임진왜란
3.2.2 왕위 계승
3.3 즉위 이후
3.3.1 즉위 초기
3.3.2 민생과 문화
3.3.3 군사와 중립외교
3.4 왕권 강화책
3.4.1 정적 숙청
3.4.2 궁궐 복원 공사
3.4.3 측근들(북인세력)의 권력 남용
3.5 폐위 이후
3.6 사망후
4 시조
5 기타
6 가계
7 광해군이 등장한 작품
7.1 영화
7.2 연극
8 관련 문화재
9 같이 보기
10 같이 읽기
11 각주
12 외부 링크
이력
그의 성은 이,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서차남)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王位)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2]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 때에는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왕의 견제로 호성원종공신이나 선무원종공신에도 책록되지 못했다.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임금이었을 때 쓴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3]이다.
다만 대한민국에 와서 일각에서 사시(私諡)를 올려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에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이는 사시라서 회은황태손의 경우와 같이 공식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치세
1608년 3월에서 1623년 3월까지 치세하는 동안 1608년 3월에서 1619년 11월까지 1차 친정하였고 1619년 11월에서 1620년 1월까지 왕세자 이지(王世子 李祬)가 두 달 간 대리청정하였으며 1620년 1월에서 1620년 2월가지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하였고 그 후 1620년 2월에서 1623년 3월, 계해반정으로 인하여 폐위될때까지 2차 친정하였다.
생애
세자 책봉 이전
생애 초기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金希哲)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세자 건저의 문제
당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王世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얼이라는 열등감을 가졋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더는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의정부좌의정 정철은 건저(建儲)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동인의 영수인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의 책봉 문제로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경연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했다. 선조는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세자 건저 문제에서 동인 이산해의 계략에 넘어간 정철 등의 견제로 실패하였다. 이산해는 정철, 우의정 류성룡 및 다른 대신들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달려가 서인에서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다.
정철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고, 동인은 이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많은 서인을 외직으로 쫓아버리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이 일의 처리 문제 때문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의 문제를 통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자 시절
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왕위 계승
의인왕후 사후 선조는 계비를 간택,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그 후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내심 탐탁치 않게 여기고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어린 상태에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약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여 승하하였다. 일설에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때 교서는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 판단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출처 필요]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유영경은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 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의 거부감만 가중시켜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주살되고, 사후에도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유영경 등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이후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위 이후
즉위 초기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바로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 났고 이점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 조차도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궁궐 공사로 모두 말아 먹었다" 라며 비판한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함으로써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억지로 시행했으나,두 번이나 폐지하려 했다.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하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이 없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책인《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중립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한편,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고,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후금에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면서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크게 반발하고 대노하여 "후금(여진족 세력, 흔히들 오랑캐라고 불림)에게 사대를 대하는 것은 왜란 때 명나라에서 군을 파병하여 우리 조선군을 도와주었는데 사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배은망덕하고 오랑캐만도 못한 천한 놈이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이 나중에 말이 씨가 되어 광해군이 서인세력들이 이끌었던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는 빌미를 광해군이 제공해준 셈이였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의 주둔으로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
왕권 강화책
정적 숙청
1609년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 승계 원칙을 주장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명나라가 활용하던,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김직재의 옥과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자 1613년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영창대군 살해 역시 광해군과 북인들의 측근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주도하여 결과적으로 광해군에게 패륜군주 이미지를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만 하고 말았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왕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고, 1618년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궁궐 복원 공사
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4] 또한, 측근들의 월권과 부패가 문제시되었으며,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 집권 당시의 실권자 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은 부원군 칭호의 '창'자를 따 3창 부원군이라 일컬어졌다. 일부 신하들과 후궁들 사이에서는 뇌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서 서인과 반정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명분을 주게 되었다.
측근들(북인세력)의 권력 남용
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5] 이같은 행위들은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 의해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폐위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곧 반정군에 의해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임당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곧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던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는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였고, 부인 유씨 역시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뒤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유배살이를 하였으며,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사망후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에 의해 봉사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는 사건)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시조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겼다고 한다.[6]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 푸른 산 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는 비바람이 치는 척박하고 초라한 귀양생활을,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는 그러한 척박함과 비교되는, 노도처럼 치는 푸른바닷물과 가을빛이 든 푸른 산 등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척박함과 푸름의 대비는 화자의 마음을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자내면 속에서는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타
2002년 11월 15일부로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이는 사시(私諡)로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7] 일부 한자문화권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8]
가계
- 조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 조모 : 하동부대부인 하동 정씨(河東府大夫人 河東 鄭氏, 1522~1567)
아버지 :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어머니 : 의인왕후 반남 박씨(懿仁王后 潘南 朴氏, 1555~1600)
- 어머니 : 인목왕후 연안 김씨(仁穆王后 延安 金氏, 1584~1632)
- 이복동생 :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 이복동생 : 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 1606~1614)
친어머니 :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 친형 : 임해군 진(臨海君 珒, 1572~1609)
광해군 (1575 ~ 1641 / 재위: 1608 ~ 1623) - 15년 1개월
- 정비 : 폐비 문화 유씨(廢妃 文化 柳氏, 1576~1623)
- 장자 : 폐세자 지(廢世子 祗, 1598~1623)
- 며느리 : 폐빈 밀양 박씨(廢嬪 密陽 朴氏, 1598~1623)
- 며느리 : 미상
- 서손녀 : 김문거(金文擧)의 처
- 차남 : 대군, 이름 미상(요절)
- 후궁 : 소의 윤씨(昭儀 尹氏, ? ~ 1623)
- 장녀 : 옹주(1619 ~ ?) - 남편은 박징원(朴澂遠), 승지에 추증된 박지성(朴至誠)의 아들
- 후궁 : 소의 홍씨(昭儀 洪氏)
- 후궁 : 소의 권씨(昭儀 權氏)[9]
- 후궁 : 숙의 허씨(淑儀 許氏) - 허경(許儆)의 딸
- 후궁 : 숙의 원씨(淑儀 元氏)
- 후궁 : 소용 정씨(昭容 鄭氏, ?~1623) - 인조반정이 일어난 날 자살하였다.
- 후궁 : 소용 임씨(昭容 任氏, 1598~1628) - 『연려실기술』에는 임몽정의 서녀로 13살이었던 1610년에 입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폐출된 후궁 중에서 유일하게 광해군을 귀양지에서 모셨다.
- 후궁 : 소원 신씨(昭媛 辛氏)[10] - 신경의 딸/ 인빈 김씨의 조카
- 후궁 : 숙원 한씨(淑媛 韓氏) - 한보향(韓保香)[11]
- 후궁 : 상궁 이씨(尙宮 李氏)
- 후궁 : 상궁 최씨(尙宮 崔氏)
- 후궁 : 궁인 조씨(宮人 趙氏) - 조의(趙誼)의 딸.[12]
- 후궁 : 궁인 변씨(宮人 邊氏) - 변충길(邊忠吉)의 딸.
광해군이 등장한 작품
- MBC
- 《여인열전 서궁마마》(1982, 배우:이덕화)
- 《임진왜란》(1985, 배우:황치훈)
- 《회천문》(1986, 배우:이희도)
- 《허준》(1999, 배우:김승수)
- 《탐나는도다》(2009, 배우:이호성)
- 《구암 허준》(2013, 배우:인교진)
- 《불의 여신 정이》(2013, 배우:이상윤, 노영학)
- 《화정》(2015, 배우:차승원, 이태환)
- KBS
- 《서궁》(1995, 배우:김규철)
- 《천둥소리》(2000, 배우:김주승)
- 《불멸의 이순신》(2004, 배우:이인, 주민수)
- 《쾌도 홍길동》(2008, 배우:조희봉)
- 《간서치열전》(2014, 배우:임호)
- 《왕의 얼굴》(2014, 배우:서인국, 서동현)
- 《징비록》(2015, 배우:노영학)
- SBS
- 《왕의 여자》(2003, 배우:지성)
- TvN
- 《왕이 된 남자》(2019, 배우:여진구)
영화
- 《인목대비》 (1962, 배우:허장강)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배우:이병헌)
- 《대립군》 (2017, 배우:여진구)
연극
- 《광해, 왕이 된 남자》(2013, 배우:배수빈, 김도현)
관련 문화재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해인사 소장)
같이 보기
- 조선왕조실록
- 조선 왕 가계도
같이 읽기
명나라
만력제 (1572년 ~ 1620년)
태창제 (1620년)
천계제 (1620년 ~ 1627년)
만주
천명제 (1616년 ~ 1626년)
각주
↑ 《인조실록》 인조 19년(1641년) 7월 10일 <광해군이 7월 1일에 죽다> 기사.
↑ ‘왕의 얼굴’ 서인국, 임진왜란 속 용맹한 세자 광해 재조명
↑ 《광해군일기》 광해 120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0월 30일(신유) 1번째기사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년) 4월 2일 <영건도감에서 관동 지역의 벌목으로 인한 일로 아뢰다> 기사.
↑ 이이첨과 김개시의 숙청작업은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설과 왕권 강화를 위한 다른 방편이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 <인조실록> 인조 19년(1641년)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기사
↑ 사이버 조선왕조 서고의 <혜종대왕문서>
↑ 역대국군(歷代國君) 광해군 항목.
↑ 《어우집》非一權昭儀。外家切戚趙漢昌姻婭近習。
↑ 《공사견문록》…갑자기 그 주인을 배반하고 신소원(辛昭媛)의 방에 가서 의탁하고…
↑ 김려 작, 《한숙원전》
↑ 광해군일기121권,9년(1617)11월21일3번째기사
외부 링크
광해군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광해군”. 《네이버캐스트》.
| 전 임 선조 | 1608년 3월 17일 ~ 1623년 음력 3월 | 후 임 인조 |
| 전임 선조 | 조선의 권서국사 1608년 3월 16일 ~ 1609년 6월 2일 | 후임 광해군 (정식 국왕으로 책봉) |
| 전임 인종 | 조선의 대리청정 1592년 ~ 1597년 | 후임 광해군 |
| 전임 광해군 | 조선의 대리청정 1606년 ~ 1608년 | 후임 봉림대군 |
분류:
- 조선 광해군
- 1575년 태어남
- 1641년 죽음
- 조선의 군인
- 조선의 공신
- 유교 신자
- 한국의 섭정
- 조선의 저술가
- 조선의 작가
- 가족 살해자
- 운현궁
-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
- 폐위된 군주
-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 병사한 사람
- 조선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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